캄보디아의 슬픈 역사의 현장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캄보디아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하나가 앙코르와트. 실제로 많은 한국인들이 앙코르 유적을 보기위해 캄보디아를 찾는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앙코르와트를 방문하기위해 씨엠립을 찾지만,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관광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은 어떤 곳을 방문하게 될까?


동남아여행을 준비하면서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캄보디아의 지난 역사 이야기를 프놈펜에서 만났다. 1970년대 고작 4년이라는 집권체재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했던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사건을 알게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던 크메르공화국.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고 난 후에 프놈펜에 크메르 루즈가 권력을 차지한다. 나라 이름을 민주 캄푸차로 바꾸고, 혼란한 나라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강한 정책을 내세운다. 바로 극닥적인 공산주로 바꾸기 시작한 것. 도시 주민의 강제 농촌 이주가 대표적이다. 크메르루즈는 자신들의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국민들을 반동분자로 몰고, 고문을 하고 죽게했다. 많은 이들을 죽게한 킬링필드 지역이 있는데 그중 프놈펜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 규모가 큰 킬링필드를 방문한다.





프놈펜 수도에서 15km 정도 떨어진 킬링필드에 찾아가기위한 방법으로 뚝뚝이를 빌려 가는 방법이있다. 보통 15달러를 요구한다고 하던데, 뚝뚝이 기사와 협상을 잘 못할경우 편도요금으로 책정되어 프놈펜으로 돌아올떄 한번 더 금액을 지불해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출발전에 확실한 스케쥴을 지정하는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이곳에 방문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왕 프놈펜에 왔으니 킬링필드에 가봐야하지 않겠냐는 이야기에 프놈펜에서 9개월째 일하고 있는 대학친구와 오토바이를 빌려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프놈펜에서 1일 (24시간) 오토바이를 대여하는데 7 달러. 주유비 별도. 





오후 12시 20분쯤 프놈펜에서 출발했다. 캄보디아 현지인들이 오토바이를 많이 타고 다니기때문에 헬맷을 안쓴 사람들이 많아서 괜찮을 것 같아도 안전과 더불어 외국인들은 특별히 헬맷 검문이 심하다고해서 꼭 헬맷을 써야한다. 대여한 헬맷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것 같았지만 그래도 꼭 써야했다. 도로에 질서가 없이 난잡하게 오토바이들이 지나다니는걸 본다면 헬맷을 안쓸 수가 없다. 그리고 필요한건 마스크. 프놈펜을 벗어나면서 부터 모래바람이 흩날리기 시작하는데 장난이 아니다. 이 먼지를 마시고 나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 뒤꽁무니에서 나오는 매연과 모래먼지바람 때문에 시야가 흐려질 수 있으니 큰 트럭 뒤쪽으로는 따라가지 않는것이 좋다. 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서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렸지만... 친구는 그야말로 폐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했어..ㅠㅠ 


더군다나 도로 표지판이 영어로 킬링필드라 쓰여있지 않고, 크메르어로 써있어서 찾지못해 한참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1시쯤이 되서야 청아익(Cheoung Ek / 집단학살 현장)에 도착했다. 직접 지도보고 찾아간다면 유의하자.





이곳이 프놈펜가 가장 가까운 아익 킬링필드 현장. 입장료에 오디오가이드를 포함하여 1인 6달러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선다. 한국어로 된 오디오가이드를 귀에 꼽고 천천히 입장한다. 순서대로 번호를 눌러가며 설명을 들으며 차분히 관람을 하면 된다. 오디오가이드에 흘러나오는 음성이 차분한 남자분이셨는데, 킬링필드의 엄숙한 분위기를 전달해주셨다. 친구랑 말도 없이 서로 오디오가이드의 내용을 쫓으며 걸어들어갔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입장료 6 USD (2013.9.14 기준 / 6711원)





프놈펜에서 보았던 뚜어슬랭 박물관은 당시 크메르루즈에 의해 심문과 고문을 받던 수형소였다. 이곳에 투옥되었던 사람들을 트럭에 가득 싣고 이 자리에 멈춰섰다. 그래서 "Truck stop" 이라고 쓰여있는 이 안내판을 볼 수 있는데 두 눈을 헝겊으로 가린채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고 도착했던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상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오디오가이드의 설명이 계속되므로 곳곳에 있는 벤치에 앉아 차분히 설명을 들었다. 





킬링필드는 영화 <킬링필드>로 세상에 더 잘알려진 탓에 미국인,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킬링필드가 미국과 베트남 전쟁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미국은 베트남과 연결된 땅굴을 없앤다는 이유로 캄보디아에 폭탄을 투하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프랑스 유학시절 공산주의에 매료된 폴포트가 사람들에게 이념을 주입시키며 미국에 대한 저항으로 탄생하게된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공격하면서 권력을 쥐게 되었다. 미국에 대한 반발심에 의해 그들이 똘똘뭉치는 계기가 되었을것 같다.


프놈펜의 지식인층을 학살하던 크메르루즈는 농촌에서 가난에 허덕이고 굶주리던 모습을 보다가 수도 프놈펜에는 잘 살고 풍요로운 모습에 화가나 마구잡이로 고문하고 죽이기에 이르른다. 지식인이라고해도 교사, 안경을 쓴 사람,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박힌 사람으로 분류해 냈고 나중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처음엔 어떻게 같은 국민들에게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하나하나 역사를 따라가다보니 그 누구도 탓하기 어려운 눈시울이 붉어질 이야기만 남았다.






그리고 조용히 길을 따라가면 움푹 움푹 파인 곳을 볼 수 있다.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사람들을 묻었던 집단학살 장소다. 

한 웅더이안에 450명의 희생자들이 잠들어있다.





아직도 그들의 유해를 다 거두지못해 비가 내리면 흙이 파이고... 뼛조각들이 위로 올라온다고 한다.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따라 나오는 호숫가에서 킬링필드에서 살아남은 분의 인터뷰를 들었다. 

어린 아이였던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한 할아버지가 희생했다고 한다. ㅠㅠ



오디오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면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고 이상했다. 우리나라도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를 갖고, 그 이후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다른 고민을 하고,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지 못했던것 같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들이 들던 장소였다. 메콩강의 비옥한 땅을 갖고, 우리에게 식량원조를 하던 잘 살던 캄보디아가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캄보디아 프놈펜에 방문하기 이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캄보디아는 불교국가라 희생자들을 화장하길 원한다던데,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루즈를 내쫓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그 명목을 잡기위해 킬링필드를 계속적으로 상기시키기 위해 유골로 상품화했다는 지적이 있다. 위령탑 층층마다 유골을 쌓아놓은 모습이 좋지않은 이유다. 우리의 눈에는 이색적인 풍경으로 보이겠지만, 기념사진을 찍는데 유의하도록 하자. 



희생자들을 넋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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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식도락가를 꿈꿉니다! By.silverly(실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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